브람스 일화들
1877년 브람스는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 명예 음악박사 칭호를 증정하겠다는 통지를 받았으나, 브람스는 영국에 대해 별로 호감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러 대학까지 가서 따분한 의식에 참여해야 했으므로 그 칭호를 사양했다. 그 2년 뒤인 1879년 3월 11일에 독일의 브레슬라우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칭호를 제시받았는데 여기서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와 같은 귀찮은 조건이 없었으므로 기꺼이 이것을 받았다.
그래서 그 답례로 이 <대학축전 서곡>을 작곡하게 되었다. 브람스의 관현악곡 중에서 가장 널리 애호되는 곡으로, <제2교향곡>과<제3교향곡>의 사이인 1880년에 완성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 괴팅겐에서 학생들과 사귈 무렵 익힌 "4곡의 학생의 노래"에 작곡가 자신이 만든 주제를 교묘하게 엮어서 브람스 특유의 뛰어난 음악성으로 전체를 하나로 화려하게 혼합하여 완성하였다. 특이할만한 점은 그가 즐겨 사용하지 않는 타악기들이 많이 사용된 점인데 브람스는 이 곡에서 타악기를 장난삼아 '터키보병의 음악'으로 동원하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학축전 서곡- 캐나다 브라스밴드
이 곡은 쾌활하고 유머러스하며 명랑하여 브람스도 <웃는 서곡>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의 명예박사 학위 증서에는 그가 '현시대 진지한 음악의 대가들 가운데 첫 번째'라는 표현이 기록되어있다. 곡이 완성되자마자 4성부의 피아노곡으로 편곡하여 클라라 슈만의 생일인 9월 13일에 그녀에게 헌정하였다.
브람스가 머물던 곳은 어디나 아름다운 풍경과 자연이 넘쳤다. 굳이 연인이 아니어도 즐겁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과 울창한 나무 그늘을 따라 걷는다면 기분이 훨훨 날아오를 것 같은 분위기, 어디나 걷고 싶은 산책로가 있고 자연이 화려하게 뻗어 있는 곳 , 그런 곳이 브람스가 흔적을 남긴 곳이다.
브람스가 뵈르테 호수의 푀르차흐를 처음 찾은 것은 그의 나이 마흔 두살 때였다. 이미 음악가로 명성이 자자한 그는 언제나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 여기저기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푀르차흐는 오스트리아 갑부라면 이곳에 별장을 하나쯤 갖고 있어야 부가 완성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별장지자 여름휴양지라서 어디를 둘러봐도 아름다운 경치가 가득 채워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어지는 곳이다. 그는 클라라와 아이들, 나중에는 (비엔나 왈츠로 유명한) 요한 스트라우스 2세 가족들과 친밀히 지냈고 종종 휴가 때면 이 가족들이 머무는 별장 근처에 자기 별장을 마련하여 왕래하며 지냈다.
유명인사라고 하기엔 너무 검소하게 옷을 입었던 브람스는 시골 길을 산책할 때면 마치 동네 농부처럼 보였다는데 한번은 친구마저 그를 못 알아본 일도 있단다. 여름마다 시골 경치에 취해 살던 브람스를 만나려고 종종 비엔나에서 친구가 찾아왔다. 마침 산책 나갔다는 그를 기다리려고 잘 빼입은 비엔나의 신사 친구는 브람스가 거닌다는 길목에서 그를 기다리고 섰는데 저 멀리서 셔츠 단추를 풀어 헤치고 밀짚모자를 쓰고 흰 수염 난 노인이 손을 흔들더란다. 웬 시골 농부가 아는 체 하는가 싶어 무시했더니 그 사람이 바로 브람스였다나!
성공한 음악가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브람스였지만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옷이 헤어져도 기워 입고 그나마 평생 입던 옷도 몇 벌 되지 않았다. 브람스가 검소하게 생활했다는 것은 박물관에 남아있는 여행 소지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는 인색했지만 어려운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에는 아끼지 않은 브람스는 번 돈을 유익하게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브람스는 늘 수수한 차림과 검소한 생활을 했다. 칸트만큼이나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알려진 그는 늘 새벽 일찍 5시쯤 일어나서 한시간이 넘게 새벽 산책을 하고, 정오 혹은 12시 반쯤 ‘붉은 고슴도치로’라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오전에는 무조건 작품활동을 했다.
브람스는 사람이 많은 거리를 좋아했다. 특히 아이를 좋아해서 점심 식사 후 산책할 때는 주머니 가득 사탕을 넣고 나가 공원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나눠 주는 일을 즐겼다. 브람스가 아이들에게 준 사탕은 조약돌처럼 생겨서 돌멩이로 깜빡 속은 아이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는데 그는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웃는 것을 보며 자신도 즐거워했다고 한다.
브람스 삶에 가장 큰 명예를 안겨준 일은 음악동호회협회 총음악 감독으로 취임한 일이다. 당신의 작곡가들이 흔히 그렇듯 음악가에게 공식적인 직업은 드물었다. 유럽 음악의 본산, 하이든과 모짜르트, 베토벤이 활동했던 비엔나. “비엔나 음악계의 수준”으로 불리는 상징적인 직위에 오른 브람스는 최전성기를 누렸다. 비엔나의 음악 취향을 학구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가 3년 동안 구성한 음악회의 레퍼토리와 연주자의 기량은 최고의 수준이었다.
브람스는 작곡가로 성공하기 전 한 때는 비르투오조(‘특별한 재능이 있는’이란 뜻) 피아니스트였고, 음악학에 대한 열정도 컸다. 음악 자료와 책에 대한 욕심이 많아 열 살 때부터 광적으로 책을 모았으며 희귀본에 대한 애착이 컸다고 한다. 또한 크리잔더, 얀, 노테봄 등의 음악학자들과도 교류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요에 대한 연구 등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브람스는 문학 외에도 회화나 조각,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미술가인 아르놀트 뵈클린, 안젤름 포이에으바흐, 아돌프 멘첼, 막스 클링어 등과도 교류했다고 한다.
죽기 얼마 전 음악회에 참석한 브람스에게 한 지인이 곤란한 질문을 했다. 지금까지 작곡한 음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마음에 드냐고.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 가장 나중에 만든 것이 마음에 들지..” 끝없이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닐까 .
비엔나에서 실업가로 크게 성공한 아이히홀츠는 브람스의 열렬한 팬으로 자주 브람스를 자기 별장에 초대했다. 브람스가 죽고 난 후 그는 브람스와 관련된 작은 것들을 하나씩 모아서 자기 별장에 최초로 브람스 박물관을 만들었다. 브람스 전시품들은 신발 , 양말, 찻잔, 비누, 칫솔, 망원경, 트럼펫, 펜, 나비넥타이, 서류가방 등 극히 개인적인 것들이다. 이렇게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한 친구의 정성이 느껴진다.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이 너무 슬퍼서 양말과 칫솔, 작은 비누조각까지 모아 둘 애정을 가진 인연을 만난다는 건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을 듯 싶다.
( 비엔나 칸타빌레 , 삼성출판사, 2008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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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의 마지막 이야기
클라라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유언장처럼 작곡한 마지막 작품 ‘ 네 개의 엄숙한 노래’는 도이치 레퀴엠처럼 성서의 구절을 가지고 만들었는데 그 내용이 인생 여행길 마지막에서 말하는 독백, 그의 인생관을 요약하는 마지막 연설과 같네요.
네 개의 엄숙한 노래 가사와 노래 ( 가사와 노래를 들어보세요 )
http://blog.daum.net/amd1756/15778781
1. Denn es gehet dem Menschen wie dem Vieh (Salomo, Kap.3)
인간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전도서 3: 19-22
2. Ich wandte mich und sahe an (Salomo, Kap.4) 내가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전도서 4: 1-4
3. O Tod, O tod, wie bitter bist du (Sirach, Kap.41) 오, 죽음이여 예수 시락서 4: 1-4
4. Wenn ich mit Menschemzungen (Korinther I, Kap.13)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고린도전서 13: 1-13
가사 내용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 내용이 정말 와 닿네요. 브람스는 자기 일을 진심으로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있었던 사람이었죠 .그가 진정으로 슬퍼한 것은 어쩌면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이 아니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당하는 삶의 고통이었던 것 같네요. 진심으로 공감이 갑니다. 노래를 들으며 노랫말 음은 따라갈 수 있으니 고등학교 때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배운 보람을 생전 처음 여기서 느끼네요. .
독일어 가사를 음미해보면서 노래를 들으면 마치 브람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 같은데요, 역시 네 번째 노래가 클라이맥스이며 브람스가 말하고 싶은 마지막 말이겠지요. 고린도 전서 13장.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영원할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는 강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를 두 번 반복하네요. 그 마지막 소리가 정말 밝고 자신에 차 있네요. 아 마지막 노래에서 그는 그의 삶과 사랑에 대해 정말 자랑스러워하고 있는것 같군요 .
그의 존재에는 신앙심이 두터웠다는 어머니, 가난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음악 기초를 잘 세워줄 좋은 스승에게 데려가고 스승들의 조언을 무시하지 않았던 아버지, 그를 알아본 스승들, 친구들과 슈만, 클라라, 그리고 그가 태어난 시대가 많은 영향을 미쳤겠지요.
산업혁명이 무르익어 유럽에 재화가 넘치던 황금시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가장 화려했던 마지막 낭만주의 시대에, 남의 아내를 훔쳐 도망 다니던 낭만파 음악가 리스트나 바그너보다도, 조르드 상드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했던 낭만적인 피아노 소리의 쇼팽보다도 브람스는 더욱 낭만적으로 살았던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브람스의 생애야말로 바람부는 쓸쓸한 함부르크의 가난한 지역 음악가들이 소중히 키운 재능 있는 아이가 멋있는 청년이 되었고, 그렇게 잘 자란 청년이 유럽 음악계가 인정하는, 위대한 음악가의 계보를 잇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존경받는 어른이 되었다는 행복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의 가난한 아버지는 피아노를 잘 치는 브람스를 미국에 데려가 돈 벌 생각을 했는데, 스승은 브람스의 재능을 더 갈고 닦는 쪽으로 조언했다고 하네요. 당장 돈이 필요했을텐데도 아버지는 그 조언대로 연주로 돈벌이시키기보다 스승에게서 음악을 더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지요. 브람스는 나중에 그의 음악에 있는 따뜻함과 유머감각은 가난했지만 자신을 소중히 여겨준 어른들에게 둘러싸여있던 어린 시절 덕분이었다고 했다네요.
어쩌면 브람스는 위대한 음악가 중에서 드물게 크게 고생하지 않고 편안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하이든이나 바흐, 모차르트처럼 평민이라는 신분 때문에 자유가 구속되지도 않았고, 병과 병 치료 때문에 생긴 중금속 중독으로 처절하게 고통 받았던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처럼 힘들지도 않았고, 불안정한 생활고로 흔들렸던 다른 음악가와 달리,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 부와 명예와 사랑과 자유, 유럽 최고의 풍경들을 누리며, 남에게 베풀면서 존경받으며 살았던 음악가인 것 같네요.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는 가족, 스승, 친구들과 열렬한 팬들, 음악 후배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기 일을 정말 즐기고,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다 간 브람스.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 했던 사람. 그리고 그런 존재에서 나온 작품. 그것을 알게 되어 정말 좋았습니다.
‘우수에 찬 브람스 음악, 외롭고 고독한 브람스’라는 고정관념을 다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그의 생애를 전체로 보니 이런 단어들은 반대파였던 화려하고 극적인 것을 좋아헀던 바그너 추종자들이 강조한 단어들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 아이러니하게도 화려하고 극적이었던 바그너는 그의 낭비벽 심한 화려한 생활과 애정 행각으로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지요). 그의 음악을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는 음악'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는것 같군요 .
브람스의 열정과 사랑, 따뜻한 마음을 알고 나니 그의 음악이 더욱 소중하게 들립니다. 이것이 이번학기에 저에게는 아주 큰 수확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흔적, 브람스라는 한 사람의 생애 전체가 필요했던 - 그의 평생의 일과 사랑의 흔적인 작품들을 누리고 즐기는 것도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삶을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이겠죠?
브람스-- 잠의 요정
브람스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될 내용을 첨부파일로 붙였습니다.
잘 정리된 내용이어서 그냥 묻히기에 아까워서 붙여봅니다.
가벼운 브람스 피아노 음악은 여기서 감상해보세요 .
http://music.bugs.co.kr/info/album/?album_id=207928
그 외 음악은 여기서 감상해보세요 . 왼쪽에 있는 브람스 부분을 누르세요 .
좋은 음반을 정성스레 올려놓았네요. http://blog.daum.net/amd1756/15778781
브람스 음악 감상에 도움이 되는 글.hwp



